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민족의 식사량 (문단 편집) ===== 소고기 섭취에 대한 반론 ===== 위에서 '고기를 많이 먹었다'라고 한 일화들은 몇몇 일화일 뿐이다. 조선시대는 500년이나 되는 만큼, 아무리 전반적으로 고기를 못 먹는 시기였다 해도 한해 두해 푸짐하게 육류가 공급되었던 때는 작게나마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들 일화만으로 사회 전반의 고기 소비량을 추측하기는 곤란하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소고기 섭취량에 대한 계산이 매우 이상하게도 소의 마릿수를 인구수로 나눈 추정값인데, 이 추정값에서 소의 마리 당 무게를 현대 한우랑 비슷한 600kg으로 잡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까지 한우의 무게는 200kg 내외였으며 더 따져야 하는 것이 한우 중량이 200킬로 나간다 해서 이게 다 고기가 되는 게 아니라 뼈, 가죽 같은 못 먹는 부위를 제외하면 고기량은 무게의 3할밖에 안 된다.[* 가축 한마리에서 나오는 '''[[https://m.blog.naver.com/jb11113/222337326404|체중 대 고기량을 도체수율이라 하는데]]''' 소는 체중 대비 효율이 돼지보다 더 떨어지는 걸 알 수 있으며 링크에 개제된 기준은 지속적인 품종개량으로 수율이 높아져 21년도에 다시 변경된 것인 만큼 조선시대엔 30프로 내외였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또한 지금처럼 곡물로 살을 찌운 소들이 아니라 농사에 쓰이던, 여물을 먹던 늙은 소들이 도축되었다. 괜히 갈비를 주로 먹은게 아니다. 기름기 있는 부위는 거의 없고, 살도 질기고 냄새나서 구워먹기 적합한 부위는 갈비살 뿐이었기 때문이다. 승정원일기의 하루 도축량 천여마리를 인정한다 해도 평균 소비량이 400g 정도밖에 안된다. 소 도축에 대한 정량적인 기록을 확인해보면 구한말 1909년 기록된 사육두수는 약 63만 마리이고 도축두수는 약 17만 마리였다. 아무리 구한말에 국가 사정이 어려워졌다지만 그래도 인구와 산업이 팽창한 근대 시기인데, 그보다 100년도 전인 1775년도에 38~39만 마리를 도축했다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쉽사리 믿기 어렵다. 1920년대가 되어서야 150만 마리가 사육되었고, 30만마리가 도축되는건 40년대에 와서야 가능했다. 상설시장이 부재하고 유통망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과거엔 고기가 있다 하더라도 민간에까지 보급되고 소비되는 과정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심지어 소고기를 기껏 구했더라도, 보관 상의 문제로 인해 도축한 고기를 썩기 전에 빠르게 해치워야 했다. 결국 당시 식사의 대부분은 밥과 국, 그리고 절인 채소,김치와 간장이 전부였다. 소고기가 이런 사정이니 소고기 이외의 고기 섭취량은 더 적었을 것이다. 내륙 지방에서 해산물 섭취량은 뻔했을거고, 조선은 돼지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다. 개를 잡는 것이 소를 잡는 것보다야 훨씬 만만하긴 했어도 개는 빨리 자라는 편도 아니고 고기가 많이 나오는 편도 아니다. 닭도 지금처럼 많이 기르지도 않았고 다 늙어서야 겨우 잡았다. 계란의 크기는 지금보다 조금 작았으며 지금처럼 매일 하나씩 낳지 않고 나흘에 하나 꼴로 낳았기에 계란도 흔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